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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이슈 모음! Tumblr



이자혜 에버노트에 전체공개로 올라온 책글입니다.

문제가 될 시 삭제하겠습니다.


어제노세카이

 출처 - www.evernote.com/pub/view/loofahgoober/sdfsdfwesrew/dda6ba1d-dbb1-411e-b118-06dc826f6bb1?locale=ko#st=p&n=dda6ba1d-dbb1-411e-b118-06dc826f6bb1


는 이자혜이며, 만화가이고,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미지의 세계>라는 웹툰을 연재했던 사람이다. 인터넷에서 만화를 연재해온 것은 아마도 2006년부터였을 것인데,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생겼던 적은 연재를 시작한 후 1~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내 만화는 한창 페미니즘 적으로 읽히고 있었고, 많은 페미니즘 성향의 단체나 창작자들이 나와 내 만화를 긍정적으로 즐겨 호명해왔다. 내가 트위터에서 욕을 지껄이는 자세가 트페미들에게 강인하고 거리낄 것 없는 페미니즘의 투사로 보였던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려본 적이 없던 무명의 창작자로서 남들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 좋았고, 내 만화가 주목받게 되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은 창작자로서 좋은 자세는 아니었다. 철저한 준비자세 없이 대중에게 함부로 드러내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과, 시류에 자기비판 없이 편승하며 소속감을 느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랬다.

그런데 2012년부터 2년 정도 연락하고 지냈던 여성(이하 A), 201610월 나와 내 친구 이익에 대한 폭로문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그 글은 자신이 미성년자이던 2013년에 이익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간을 당했고, 그게 나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은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것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트윗을 올렸다. 나는 그날 운이 나쁘게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이미 합리적 행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나는 내 기억과는 몹시도 다른 주장의 그 글을 읽고 다분히 감정적인 반박문을 올렸다. 그러자 수많은 트위터 인간들은 더욱 괘씸하다는 듯이 나를 공격했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그것도 여태껏 나를 좋아한다고 하던, 내가 믿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 한 사람에게 원색적인 공격을 퍼붓는 것은 정말로 심리적 고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각오를 다짐한 것처럼 나에게 온갖 분노를 발산했다. 당신이 반평생이상 알고 지냈던 오래된 친분들, 직업적 인간관계들, 자신을 그렇게 칭찬하던 사람들이 내 모든 도덕적 결점을 트집 잡아 욕을 퍼부으며 너의 죄를 시인하라며 윽박지르고 쥐어흔든다고 생각해봐라. 그런 상황 속에서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폭로문이 올라온 지 하루도 안 되어 공적인 지면에 걸린 나의 모든 만화는 삭제되었고, 단행본은 모두 회수 및 절판되었고, 나의 모든 직업적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내 만화에 대한 리뷰나 과거에 매체에서 했던 인터뷰들이 제거되는 등, 나에 대한 공적 기록들이 빠르게 말살되어가기 시작했다. 나와 알고 지내던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또한 이자혜와 친하게 지냈으니 너도 잘못이 있다, 이자혜에 대한 의사를 밝히라고 비난과 추궁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이익을 범죄자라고 호명했고, “저는 이자혜에게 동조하지 않습니다!” 라며 고해성사들을 털어놓았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내가 범죄를 저지른 게 사실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치거나, 나의 상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자혜 옹호자라며 역시 나와 한통속으로 묶여 비난을 당했다. 나는 밟고 지나가야할 예수 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 한참동안 나에 대한 유언비어와 과거에 내가 했다는 잘못들에 대한 폭로들 또한 이어졌다. 나는 지독하게 억울했으나 이미 나의 발언권은 사라졌고 무수한 인간들이 나를 맹목적으로 증오하는 상황에서 나의 변호는 완전히 불가능했다. 나와 친한 적도 없던 사람들이 나와의 연을 끊겠다고 공언해댔고, 나의 과거 발언들을 앞뒤 맥락 잘라 끌어올려 얘는 원래 인간도 아닌 미친년이었다고 경멸해댔다. 나는 얼마동안 집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곁눈질하며 속삭여댔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해망상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길에서 나를 알아보고 팬이라고 말을 걸어오던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나는 기타 매체를 통해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인간이었고, 이 사건은 공중파 뉴스를 통해서도 언급되었으므로 분명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것은 틀림없었다. 공적이고 사적인 모든 관계의 인간들이 나와 조금이라도 연관되기를 거부했고, 나에 대한 모든 기록을 말살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로 덧칠하려 했다. 정말로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자살을 해도 납득 가능한 상황이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그러한 외부의 상황에 져버리고 한순간이나마 나약함에 휩쓸려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처음에 내가 썼던 감정적이고 오류를 포함한 글의 기조만 견지했어도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 글을 대충 요약하자면, 나는 강간을 사주한 바가 없으며 당시 내가 이익에게 욕망을 갖고 있었고, 그랬다면 내가 이익과 떡치고 싶었겠지 남한테 이익이랑 떡치라고 명령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도 나를 비난하자, 나는 마음이 흔들려 처음에는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었다. 3년 전 일이라 기억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필적 고의로라도 잘못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내가 몰랐던 것조차 잘못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나조차 나를 못 믿어버렸던 것이다.

나도 얼마간 트위터 페미니즘 이슈의 가운데 있었던 인간으로서 당시 세태에 대해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해야하고 으레 헤테로 여성들도 자신의 여혐적인 혹은 명예자지적인 과거를 반성하고 자기비판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정화되었다는 것을 인증하는 의례를 거쳐야만 동류의 사람들과 같이 놀기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과거의 오점을 덜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신도 역시 피해자였다는 서사도 가미되면 더욱 부담이 덜해보였다. PC해보이고 진보적으로 보이고 지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 같은 트페미 무리들과 계속 친밀하게 놀고 싶다면 모두 그러한 맹세를 해야 하며,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에 반하는 과거를 최대한 숨기든지, 밝혀진 과거에 대해서는 영원히 무한히 사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트위터로 페미니즘의 여러 이슈를 배워가면서 매번 나의 여혐적인 사고를 진심으로 반성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그러한 사고는 두드러지게 존재해왔는데, 이것은 우선 내가 대부분의 인간을 싫어해왔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여자이므로 여자인 타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성의 그것보다 더욱 잘 알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인생에서 성애를 표방하는 육체의 주체들이 일으키는 갈등은 내게 있어 언제나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이에 아무리 미묘하고 다양한 레이어가 존재한다고 해도 어쨌든 겉으로 뚝 잘라놓으면 여혐적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욕먹기 싫으면 적당히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한번 욕먹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명해봤자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여자를 싫어하는 마음에 대해서 묘사하기를 어릴 때부터 즐겨 시도해왔다. 그것은 언어로 일일이 털어놓기 힘든 다양한 삶의 양상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나에게는 특히 입체적인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대인배로 타고나지 못한 인간들에게 무수히 존재하는 원초적인 마음이고 부정하려고 시도해봤자 아주 끈질기게 남아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인간의 타인에 대한 악감정, 혐오, 질투, 공격성 등을 묘사하기 좋아해왔는지 설명하기는 어렵고, 많은 지면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내 작업방식이 내 악독한 인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다. 어차피 내 만화에서 그런 부정적 감정들의 주체들은 결국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비웃음을 사도록, 조소적으로 그려진다 이 말이다. 특히 왜 내가 동성혐오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싶어 했냐면, 대중매체의 주류에서 (헤테로)남자가 남자를 싫어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으로서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하게 묘사되는 반면, 여자끼리 일으키는 갈등은 흔히 보적보혹은 캣파이트따위의 작고 좁은 지루한 클리셰로서, 장르물의 사소한 일환에 불과하게끔만 그려져 왔기 때문이며 전체서사에 가미되는 개그성 미니드라마로만 묘사되었으므로. 인간에게 있어 혐오와 질투는 자신의 인생을 던질 만큼 강력할 수 있는 것일진데, 그런 작은 볼륨만으로 드러나는 게 불만스러웠으므로. 어쨌든 나의 그런 방식도 미러링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미러링은 복잡한 사고가 필요하지 않은 유치한 방법이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효과적이고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시도가 양적으로도 충분히 수가 많아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평범한 것으로 인식하면 지루해진다. 미러링이 의미 없어질 정도로 널리 쓰이게 되면 그것은 금세 고루한 것이 될 것이므로, 결국 그 이후에 있을 더 질적이고 풍부한 묘사에 대한 집중을 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성적인 대상에 대해, 특히 같은 성에 대해 촉발되는 혐오라든가 질투 따위는 추해보일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으로서, 성장환경을 통해 내 욕망들이 이미 상당 부분이 바꾸기 어렵도록 결정된 만큼 성적 정체성만큼이나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인정하려 노력해왔다. 인정하고 계속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극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민은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중요한 시도였으나, 그러한 맥락은 사람들이 알아채기에는 너무도 섬세하고 미묘한 것이었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칭찬받을 때도 그러한 맥락은 거의 비평의 요소로 불려나오지 않았고, 내 만화는 주로 헬조선청춘의 어쩌구가 되든지 혹은 미러링의 대세를 위시한 병맛문학 정도로 평가되었다. 후에 사람들에게 내가 지울 수 없는 오점을 가진 년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은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여자가 감히 여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점으로 납작해져서 나를 비도덕적 개년으로 보이도록 하기에 충분했고, 그게 내가 천인공노할 범죄자인 것으로 추론이 가능한 증거가 되었다. 기억나는 모욕 중 하나는, 내가 과거에 그렸던 만화 중에 여성 캐릭터들을 학살하고 보지에 뭘 박아서 죽이는 씬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걸 캡쳐해서 얘 좀 보래요! 원래부터 여혐 심한 미친년이었대요!” 따위의 글을 쓴 게 많은 리트윗을 받은 것이었다. 우선 어떻게 맥락을 그렇게 단순화시켜 읽어버릴 수 있는지 황당했다. 그리고 씹치들 꼬추 자르는 건 재미있고 마땅한데 보지 찌르는 것은 천인공노할 추악한 망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제발 진심에서 나오는 의견이 아니길 바란다. 미러링은, 특히 폭력적인 부분에 대한 것일수록, 잠깐 동안 그런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꼬추 자르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진짜로 자르고 싶어 할 리가 없으며, 보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체는 누구의 것이나 아름답고 섬세하고 신성하며 절대 폭력에 희생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은 현실에서의 이야기다. 창작물은 철저히 창작물로 놔둬야한다. 나도 망가의 미소녀물이나 로리물, 여성의 신체를 물화시키고 극도로 변형시키는 각종 비도덕적인 포르노물을 싫어하지만 그딴 건 그냥 장르일 뿐이다. 각 장르들이 성립되어오면서 가지는 특유의 언어가 있는 것이고 그 언어를 어떻게 갖고 놀며 새로운 재미를 창출할 수 있는가를 알려면 적어도 그 장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들 중 맥락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순화된 부분만이 대중문화에 흘러들어온다. 그것을 문제시해야 할 이유는 대중들이 비판 없이 함부로 소비하기 때문이지, 창작물과 창작자에게는 죄가 없다. 하나의 창작물을 만든 창작자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 인생을 투자해가며 제 몫을 한 것일 뿐이다. 어떻게 창작물에 죄가 있을 수 있는가? 인간가죽으로 장정이라도 해야 가능한 거 아닌가? 좀비물이나 호러, 슬래셔, 범죄액션물 등 살육이 벌어지는 창작물을 사람을 잔인하게 마구 죽인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포르노는 말할 것도 없고, 동인녀들조차 미청년들이 강간당하는 야오이 망가를 좋아한다. ‘나는 동인녀지만 강간당하는 야오이는 싫어하는데?’라고 해봤자, “내가 즐기는 창작물이 좀 더 윤리적이다라는 말 자체가 정말 의미 없게 들린다. 장르의 원류는 대부분 원초적이고 매니악하고 폭력적이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조용히 그것들을 사랑해왔다. 남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보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면 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를 열심히 찾아내서 소비하면 될 뿐이다.

 

아무튼 폭로문이 올라온 이후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하지만, 후에도 그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완전히 패닉한 상태였다.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심장이 쿵쿵거렸다. 내 인생에서 겪은 가장 끔찍한 재난이었고, 두려움에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제대로 입장을 밝혀야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 해명을 위한 긴 글을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것은 변호사가 써준 글이다, 가해자가 변호사를 선임한 것 같으니 모두 고소당하지 않게 조심하자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내손으로 쓴 글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경찰단계가 끝나도록 지금까지 4개월가량의 시간동안 변호사를 선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범죄를 저지른 증거라도 된다는 듯이, sns상에서 나는 흔히 인간이 아닌 악마인 것처럼 묘사되었고 거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으로 통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로 내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 고통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2차가해로 여겨졌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내 실명을 언급하며 비방하면 나한테 고소를 당할까봐 조심하자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단순한 감정의 표현은 모욕죄나 명예훼손죄의 성립요건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시태그로 “#나는_이자혜가_싫습니다라고 쓰자는 운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절대로 모를 복잡한 인간사들이 있고, 심지어 당사자들도 과거의 상황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공적기관조차 그것을 가리기 위해 몇 달, 몇 년 동안 조사를 거듭한다. 나중에 발견된 대화내역을 보기 전에는, 나조차 당시의 기억들을 대부분 까먹고 있었다.

나는 상대가 고소를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안이 심각해졌고, 법이 판단해주지 않으면 대중에게 영원히 중범죄의 가해자(재판을 받은 적이 없어도!)로 낙인찍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11월 즈음에 경찰서에서 고소가 들어왔다고 연락이 왔는데, 나는 강간에 관한 죄가 아닌 모욕죄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걸렸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놀랍게도 예전 핸드폰에서 당시 A와의 모든 카카오톡 대화내역을 찾아냈고 그것을 경찰에 제출했다. 그 모든 실제 대화내역들이 A의 폭로문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면 누구나 황당함에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찾은 대화내역과 비교하면 A의 폭로문의 주장들은 모든 맥락과 뉘앙스가 교묘히 날조되어있으며, 심지어 처음 만난 날의 계절조차 반대였고, 사건들의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모든 대화내역에서 A는 한 번도 이익이 두렵다거나, 나에게 어떤 피해를 호소하거나, 이익이 싫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A의 첫날부터 무참하게 강간을 당했다는 폭로문의 주장과 달리, 당시 대화에는 A가 이익과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 몇 번이나 좋았다” “잘한다는 표현을 했고 이익과 자주 연락하고 싶다며 당시 이야기를 매우 길게 늘어놓았으며 내가 그것을 잘 들어준 내역이 남아있었다. 또 이익과의 대화내역을 통틀어 내가 A와 자라고 종용한 내역도 당연히 없었다. A가 폭로문에서 주장한, 내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내용도 대화내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A는 내가 떡 사진을 보내며 떡이나 치라고 했다는데, 실제로는 단지 내가 먹은 떡 사진을 보냈던 것일 뿐이었다. 대화내역에는 이밖에도 너무도 많은 반박할 거리들이 존재하나,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왜 그 증거들을 찾아내자마자 냅다 올리지 않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억울하다면 트위터에 당장 인증을 해서 인민재판을 받아야 마땅할 터인데! 나야말로 내가 가진 대화내역 전문을 공개하고 싶었으나, 어쨌든 사건이 진행 중이며 이 일이 이미 법적인 싸움이 되었는데, 내가 가진 증거를 섣불리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전략을 바꿀 기회만 주는 셈이다. 폭로문 이후 예전에 A가 내 블로그에 남겼던 많은 글을 모두 캡쳐했는데, 수일이 지난 후 다시 보니 그 글들은 모두 지워져있었다. 즉 상대방이 증거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보이는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내가 가진 정보를 노출시켜서는 안됐다. 그러므로 나는 그동안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된 상태이다. 모욕죄로도 걸렸으나, A가 캡쳐하여 경찰에 제출한 내 글들은 A의 이름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내가 평소에 트위터에 지껄였던 주어 없는 욕설일 뿐이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았다. A<포도주와 포타주의 식사>의 오린지, <미지의 세계>의 박후정, <아이들>의 김떡순(김지현)이 자신에 대한 비방이라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A를 그린 것이 아니며, 캐릭터들과 A는 같은 점이 없다. A와 그 캐릭터들의 비슷한 점을 굳이 찾자면 긴 머리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청소년 여성 캐릭터는 내 만화에 엄청나게 많이 존재한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려왔고 학생 시절은 나에게도 인상 깊은 시기였다. 여학생 캐릭터는 내 여러 페르소나 중에서도 주요한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화들에 A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나타나있지 않으며, 그가 폭로문에 묘사한 강간 서사는 그 만화들의 서사에 전혀 없다. 폭로문 이전에 그 만화들이 A를 그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와 친구가 맺어진다거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이성관계의 묘사는 대중매체에도 많이 등장할 정도로 딱히 유니크한 서사는 아니며, 나는 A를 알고지내기 이전부터 그러한 서사를 만화로서 다양하게 그려왔고, 단편 소설이라든지 아이디어노트로도 남겨둔 것들이 많이 있었다. 무엇보다 나조차 청소년시절 그런 일들을 몇 번이나 겪은 적이 있다. 그게 A임을 알 방법이 없는 만화가 어떻게 2차가해가 되는가?

그리고 A의 주장처럼, 내가 왜 남자에게 그날 처음 만나본 다른 여자를 꼬드겨서 바치겠으며, 내가 알아서 그들이 관계하도록 종용해놓고 그 여자한테 남자랑 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그를 괴롭히기 위해 만화에 그리기까지 했다는 건 서사로서도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런 것은 나의 만화에도 그린 적이 없다. 가해자니까 피해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기에는 정말 가해한 바가 없었다. 솔직히 왜 A가 그 만화들이 자신을 그린 거라고 주장하는지, 그러한 주장을 통해 어떤 명예의 회복이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를 인생에서 한번밖에 만나지 않았고 그리 특별한 만남도 아니었다. 내가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그를 다양한 방식으로 3번이나 그릴 이유가 없다. 내가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나만의 서사와 연출들이 모두 남의 것으로 환원되고, 싸잡아 리벤지 포르노따위로 명명된다는 것은 창작자로서 지독하게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또 만약 A가 폭로문에 명시했듯이 본인도 당시에는 몰랐는데 성폭력 관련 해시태그를 보고 생각해보니 강간이더라고 한다면, A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던 내가 당시에 1차 가해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상태에서 어떻게 2차 가해를 하는가? 만약 내가 진짜 성폭력 사주 따위의 일을 했다면,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화를 통한 2차가해씩이나 가능할 정도로 실감나는 리얼리티의 만화를 그릴 수 있는 능력자라면, 아마도 나는 내가 강간을 사주한 내용을 만화로 그렸어야 맞을 것이다. 문제의 내 만화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조미지와 똑같이 추악하다고 했으며, 내가 조미지로써 나의 뒤틀린 망상을 투명하게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그게 얼마나 조악한 비난인지는 차치하고, 조미지가 그런 사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캐릭터란 말인가? 조미지는 남들을 속으로만 미워할 뿐 남들에게 직접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피해를 입히는 캐릭터가 아니며, 찌질하고 소심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도 제대로 못하는 캐릭터였다. <미지의 세계> 뿐 만 아니라 여태껏 그려온 내 대부분의 만화에서 나는 언제나 외롭고 동떨어지고 고통 받는 소심한 캐릭터들을 묘사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만화에 그린 모든 주인공 캐릭터가 나고, 그 사건들이 모두 나의 일이겠는가? 그 만화의 독자들은 그림일기에 불과한 것을 창의력의 산물인 줄 알고 속았기 때문에 나를 괘씸히 여긴단 말인가. 창작물로서 창작자의 인격이나 사건을 추측하는 것은 언제나 추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창작자가 어떤 실제의 사건이나 사람을 묘사하려고 악을 써도 힘든 것인데, 창작자의 의식과 무의식과 창의성이 뒤섞여 복잡한, 일류작가나 학자들도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창작의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일축해버릴 수 있는가? 서사창작물이 다 남의 일기거나 남의 자위용 허접판타지에 불과하다면 예술을 감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물이 사실은 다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게 진짠지 뻥인지 퍼포먼스인지 알아낼 수조차 없다!


 


폭로문 이전에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책을 만들겠다는 사람에게 (고료는 거의 없이) 참여해달라는 메일을 받았었고 나는 거기에 기꺼이 응했었다. 폭로문 공개 이후에 그 사람에게 받은, ‘이 책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므로 당신의 참여를 거절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잊을 수 없다. 가해자로 결정 난 인간은 가해자로서의 정체성만 가진단 말인가? 나도 오래전부터 인터넷에 글을 쓰고 만화를 올려왔으므로 선정적인 욕은 수없이 먹어왔고 그때마다 상처도 입었다. 나 또한 기분 나쁜 섹스나, 성폭력의 경험을 겪은 적이 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섹스가 내 인생에서 더 적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나에게 진짜 고통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한 자들에게 딱히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의 존엄성을 위해서 내가 겪은 나쁜 일들을 언제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입은 작은 상처를 과장하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기만적이고, 실제 폭력의 희생자들의 고통을 희석하는 것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피해자의 입장을 모르는 가해자, 미친년, 죽어야할 썅년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폭로문이 공개되고 나서 옛날에 나를 추행했던 남자도 나를 범죄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봤다. 이건 아주 웃긴 상황이다.

피해자의 약자성을 거부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상처를 회복하기 어려운 나약한 존재일 필요가 없다면, 가해자 또한 평생 죽여 마땅한 놈 취급하는 것이 동등한 기준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범법이 그렇듯이 성폭력 또한 경중이 있고, 어쩔 수 없이 피해의 규모를 수치화할 수밖에 없다. 다른 범죄와 같이 가해자는 법적으로 정해진 벌을 받으면 되고, 인간이므로 후회하고 뉘우칠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가해자로 몰려 온갖 언어폭력과 분서갱유로 내 존재가 말살되기 이전, 오래전부터 지녀온 생각이다. 인간사는 도덕, 법으로 가리기 힘든 복잡한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명쾌한 것보다 복잡한 것이 더 많다. 윤리와 위법을 따지는 것은 언제나 신중하게 임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판가름해주는 사법기관에서조차 몇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릴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대중들은 나에 대해 단 몇 시간 만에 판단해버렸지만 말이다. 만약 당신이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일에 대해 남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죄를 뒤집어썼고, 제대로 변호하지 못해서 모두가 당신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라고 욕한다고 생각해봐라. 당시의 기록이 없고 증거도 아무것도 없으면 무엇으로 당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을까? 님들은 언제나 정당했으므로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다고 생각하는가? 님들은 날 때부터 깨어있는 윤리적인 페미니스트들이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항상 옳기 때문에? 특정 이즘에 몸담아 집단의 승리를 위해 행동하고 싶으면, 집단의 정치적 정당성에 흠결이 없도록 하기 위해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로 밝혀진(심지어 내 경우에 그 어떤 것도 밝혀진것은 아니었는데) 인물에게 자수해라’, ‘자살해라라고 소리치며 신상을 터는 것이 감정 표출의 목적 말고는 도대체 어떻게 정의에 입각한 행동인지 모르겠다.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이다. 그런데 당시에 좋았음을 표현한 내역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그걸 강간으로 볼 수 있는가? 당시에는 완전 좋았다’ ‘또 만나고 싶다고 여러 번 표현했는데 3년쯤 지난 후에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쁘면 강간인가? 많은 사람들이 비도덕과 불법을 구분하려하지 않는다는 것도 황당한 일이었다. 어쨌든 내 사건에 있어서 나는 가해자가 아니며 A가 겪었다고 주장하는 피해 자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므로 성폭력 자체에 대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그러한 부조리를 통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항의하는 것이다.

피해자중심주의는 필요하지만, 그것은 수사나 재판의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좀 더 배려나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지, 피해자의 모든 주장을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나. 여자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또라이도 있고 비열한 인간도 있을 것이다. 무고가 아예 없다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겠으며, 아주 조금이라도 섞여있으면 그걸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 피해자가 큰 정신적 상처를 입어서 정상적인 인지와 판단을 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그의 진술이 앞뒤가 안 맞아도 배려하고 믿어주는 것이 무조건 가능해야 한단 말인가. 세상에 얼마나 이상한 인간들이 많은데, 자신의 피해를 왜곡하고 과장하는 인간이 여자라고 없겠는가?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사소한부작용들을 페미니즘이 전략적으로, 대의를 위해 일단은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공론화 또한 인민재판과 같은 것이 아니다. 공론화는 여건상 주목받지 못하는 이슈를 가시화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역할로서 기능해야하는 것이지, 대중의 감정에 따라 악해 보이는 놈을 가려내어 말살하려는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게 됐지만. 그리고 내 사건에 있어서, 처음부터 폭로문을 올려야 할 정도로 공론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폭력에 의한 피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법적 자문을 받고 준비해서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하면 된다. 고소인에게 법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소를 하고 상황을 봐서 공권력의 대처방식이 정말 자신에게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며, 법적인 불리함을 각오할 정도로 필사적인 상태에서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공론화여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과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변호사들의 법적 조언에 의하면, 폭로문을 올리는 것보다 구체적 증거를 모아 고소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쓰고 있다. 왜 대중에 대한 폭로의 영향력을 더 믿는가? 공권력은 언제나 피해자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법은 가부장적 시스템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믿는다면 언제나 부정해야 하는 것이라서? 법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며, 아무리 부와 권력이 있어도 피하기 힘든 것이 법이다. 내 사건만 해도 경찰단계가 4개월이 다 가도록 엄밀히 조사를 했다.

누군가는 내가 가해자이기 때문에 뻔뻔하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도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항상 폭력과 강간을 두려워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인간에게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며, 모든 개인이 겪을 수 있는 비극적인 고통에 언제나 연민을 가지는 사람이다. 나는 만화에서조차 폭행, 강간, 임신, 낙태 등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몇 번이고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에게 벌을 부여해버리는 비극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 또한 두려운 폭력이다. 모든 범죄자들을 중형에 처해 몇 십 년씩 감금하고, 사형에 처해버리자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특히 자신이 분명히 행하지 않은 일로 범죄의 혐의를 받는 사람이라면. 가해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현실에 없다고 어떻게 자부하는가? 그게 단지 몇몇 씹치들의 부랄발광에 입각한 더러운 창작물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혹은 카세 료, 매즈 미켈슨 같은 개념꽃미남이 억울한 사람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억울한 일로 보이는 것이지 현실의 추남들은 그럴만하니까 그러는 게 아니겠냐고 제정신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 나는 A가 주장한 범죄를 그에게 저지른 바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A에게 미안하지 않다. 나는 A가 그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부당하게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나를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 보지 않고 미친년, 악마, 범죄자 취급하며 원색적으로 비방하고 나에 대한 허언을 퍼뜨려댄 여러 사람들도 환멸스러우나, 평생의 모토로 삼으며 콤플렉스로 점철된 소모적인 삶을 살아갈 패기가 없다면 증오 따위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 어떤 이즘이나 특정 성향으로 묶이는 사람들의 무리와 이름 붙여 묶인다는 것이 꺼려진다. 그 이즘이 얼마나 좋은 목적을 가졌든지 간에. 물론 더 이상 아무도 어디에서도 나를 그렇게 끌어들이지는 않겠지만. 왜 많은 여성학 관련 학자들이나 명사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밝혔는지도 이해가 된다. 자신이 어떤 이즘에 종사한다고 표방하는 것은 그때부터 전쟁터에 서는 일이다. 이즘 안에서조차 같은 편 인줄 알았던 모든 인간들이 한순간에 자신을 내버려도, 혼자서 싸워나가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단지 특정 단체에 후원금을 좀 내고 그들의 무엇을 소비해주는 것, 어떤 구호를 외워 말하는 것 따위로는 채울 수 없는, 세계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막대한 고민의 책임이 부여되는 일이다. 나는 어리석었고 모든 것을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고안해내는 페미니즘의 언어가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후에 있을 발전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착각이었다. 사실 아무도 자기 대신 말해줄 수 없다. 남의 언어를 외워서 말하는 것만으로는 또 다른 복잡한 모순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모서리를 하나 자르면 두 개의 모서리가 생기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름과 언어를 껴안고 살아가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판단하고 평생에 걸쳐 공부하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시하기 위해 굳이 타인들에게 빌려온 이름들을 붙이지 않아도, 자신의 언어를 이미 가지고 자신의 고유한 이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이즘이 필요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는 페미니스트냐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즘과 얽힘을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어차피 거부는 불가능하다) 나는 페미니즘으로 묶일 것이다. 나에 대한 모든 누명과 대중의 감정적 비난이 걷히면, 내 인생과 내 발언과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은 지극히 페미니즘적으로 읽힐 것이며, 내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우겨봤자 내 의지 따위는 상관없이 역사에 페미니스트로서 기록될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나는 여태껏 나의 언어로 이루어진 서사를 많이 만들어왔다. 그것을 나는 오랫동안 열심히 시도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을 위한, 당신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서사가 세상에 없는 것 같으면 당신이 직접 만들어라. 나는 그렇게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겸디갹이 얼마나 억울했을 지 이제는 이해가 되네요.
심지어 성폭력이나 성추행 심지어 성희롱으로 고소당한 것도 아닌 모욕이라니 괜한 사람 잡고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드네요.

사람들이 많이 좀 알았으면 해서 퍼옵니다. 문제가 될 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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